◇진 행: 전시 관람 및 질의 응답 (참여자_전시기획-이안 로버트슨, 클레어, 작가-파토보시치, 최지원)
◇전시 기간: 2025. 9. 10(수) – 10. 21(화) / 일요일, 공휴일 휴관
◇작품 수량: 37점
전시 개요
선화랑은 오는 9월 10일부터 10월 21일까지,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6인의 작가와 함께하는 기획전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The Way We Live Now》를 개최합니다.
도시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휴대폰 알림음, 후진하는 자동차의 경고음, 빗속의 거리, 늦은 밤의 바와 이른 아침의 카페, 달리는 배달 오토바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 등,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이며, 동시에 “City of Dreams: Fragments of Reality”라 할 수 있습니다.
런던에서 온 여섯 작가들은 이러한 도시의 일상을 예술로 바꿔 보여줍니다. 시끄럽고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을 그들은 오히려 조용히 바라보고 기억하며 소박한 장면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사유해냅니다. 이들의 공통된 시선은 ‘고요한 관찰’입니다. 화려한 장면을 좇기보다 일상에 숨어 있는 본질에 집중하고, 그림자와 고요함, 질감과 톤을 통해 흔히 지나칠 수 있는 순간들을 새롭게 드러냅니다. 탁자 위의 커피잔, 어스름한 복도, 등을 돌린 인물처럼 평범한 장면들이 작품 안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띠며, ‘우연히 마주친 순간’이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합니다.
이안 로버트슨 교수는 이번 전시에 대해 “이 작가들은 시적이고 회화적인 내면 성찰을 공유된 언어로 삼으며, 관찰과 기억을 통해 일상의 파편을 계시로 전환한다”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도시의 장관을 보여주기보다, 일상의 파편 속에서 존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행위이며, 가장 심오한 진실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 머무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연결고리는 ‘색과 분할’입니다. 도시의 풍경은 다채롭고 때로는 분열되어 있지만, 참여 작가들은 이를 절제된 색과 독창적인 화면 분할을 통해 재해석합니다.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언어로 작용하며, 때로는 형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품들은 “도시의 꿈과 현실의 파편이 교차하는 지점”을 드러내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초상을 포착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비추는 동시에, 관람객에게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이번 전시는 “다르게 보는 눈”을 제안하며, 우리가 잊고 지나쳤던 일상의 순간들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줍니다.
작가 소개
Pato Bosich_Omphalos River 2025 Acrylic & oil on canvas 160x183cm ⓒ 선화랑 제공 Courtesy of SunGallery
◇Pato Bosich
파토 보시치는 칠레에서 태어나 2000년부터 런던에 거주하며 런던 캠버웰 예술대학(Camberwell College of Arts)에서 수학했습니다. 보시치의 작업은 회화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화적·상징적 요소들이 교차하는 방대한 목소리의 얽힘을 드러냅니다. 그의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 조건의 파편화와 가치 전도의 문제를 탐구하며, ‘광인들의 배(The Ship of Fools)’ 시리즈처럼 바다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정에서 그 실체를 찾습니다. 캔버스 위에선 인상주의, 모더니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기법이 매혹적으로 융합되어, 종종 비틀린 각도로 배치된 인물들이 꿈속 장면 또는 유령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미술사적 참조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보시치는 런던을 비롯해 유럽, 남미, 러시아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단체전을 열었으며, 그의 작업은 구상적이면서도 제스처가 돋보이는 특징을 지닙니다. 특히 공간, 서사, 지시성의 신선하고 경쾌한 활용이 두드러지며, 지각과 상이한 현실이 교차하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Thomas Cameron, Fast Food Workers , 2024, 112x152cm, Oil on canvas ⓒ 선화랑 제공 Courtesy of SunGallery
◇Thomas Cameron
토마스 캐머런(Thomas Cameron)은 1992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현재 런던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일상’을 주요 주제로 하며, 도시적 삶과 그 안에서의 연대와 고립 사이의 긴장감을 집중적으로 탐구합니다. 캐머런은 스코틀랜드 던디에 위치한 던컨 조던스톤 예술대학(Duncan Jordanstone College of Art)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칼스루에 조형예술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Karlsruhe)에서 에라스무스 교환 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2022년 런던 시티 앤 길드 예술학교(City and Guilds of London Art School)에서 순수미술 석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여러 기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으며, 영국, 미국, 중국, 프랑스, 독일 등의 개인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블룸버그 뉴 컨템퍼러리즈(Bloomberg New Contemporaries)를 포함한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Sebastiain Espejo Table with glasses & river 2025 Oil & & wax on wood ⓒ 선화랑 제공 Courtesy of SunGallery
◇Sebastian Espejo
세바스티안 에스페호(Sebastián Espejo)는 1990년 칠레 비냐 델 마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작업은 빛의 재현과 시각적 경험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회화라는 일상적인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칠레 가톨릭대학교(Pontificia Universidad Católica de Chile)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한 그는 칠레와 영국의 여러 기관 및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여 왔습니다. 주요 전시로는 비냐 델 마르의 베르가라 궁전 미술관(Palacio Vergara Museum)에서의 그룹전, 런던의 필로토 파르도 갤러리(Piloto Pardo Gallery)에서의 개인전이 있습니다. 2023년부터는 런던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Tamsin Morse_ Aristotle_s Elpsis 2025 Oil on canvas 150x110cm ⓒ 선화랑 제공 Courtesy of SunGallery
◇Tamsin Morse
탐신 모스(Tamsin Morse)는 고전 신화를 현대적인 주제와 결합한 서사 중심의 회화로 잘 알려진 영국의 현대미술 작가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젠더 불평등, 권력 구조, 도덕적 모순 등 사회적 이슈를 탐구하며, 상징과 유머를 활용해 관객에게 성찰을 유도합니다. 모스의 작업은 사회적 규범과 그 안에서의 개인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듭니다. 그녀는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전시를 통해 활발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Roza Horowitz_ Othello 2023 Oil on canvas 120x130cm ⓒ 선화랑 제공 Courtesy of SunGallery
◇Roza Horowitz
로자 호로위츠(Roza Horowitz)의 회화는 유럽, 영국, 러시아 문학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작품을 통해 삶의 마법과 기쁨, 자연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그림 속에서 꽃, 식물, 나무, 동물들은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로자 호로위츠는 201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왕립예술학교(KABK, Royal Academy of Fine Arts)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로자는 1987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6세에 네덜란드로 이주해 성장했고, 헤이그 왕립예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2011년 졸업 후, 로테르담의 Zic Zerp 갤러리에 발탁되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초기 스타일은 임파스토 기법을 활용했으며, 유대교적 주제나 주변 세계를 묘사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Jione Choi_ 별 헤는 밤 Understanding the Stars 2025 Oil on canvas 160x130cm ⓒ 선화랑 제공 Courtesy of SunGallery
◇최지원
작가의 모든 작업은 ‘기억’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기억이 주는 왜곡, 변형, 생략 등의 특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흥미를 느끼며, 모든 것이 기억으로부터 연결된다는 신념하에 최근에는 미술관에서 관찰한 인물들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단순한 공간의 재현을 넘어서, 그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내면을 포착하고자 합니다.
전시서문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이안 로버트슨
순간, 하나의 프레임으로 고정된 사건. 시간을 훔쳐 멈추게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땡, 땡—침묵을 깨는 WhatsApp 메시지 알림음. 후진하는 자동차의 경고음, 빗물에 젖은 거리, 깨어 있는 꿈—그리고 기억. 멈추지 않는 대도시의 삶. 늦은 밤의 바, 이른 아침의 카페, 미니캡, 수백 가지 언어, 수백 가지 음식. 즉각적인 딜리버루, 거대한 흰 스티로폼 컵에 담긴 라떼. 그리고 자기 자신 안으로의 퇴각.
이 전시에 모인 작가들은 시적이고 회화적인 내면 성찰을 공유된 언어로 삼는다. 즉각성과 소음이 포화된 세계 속에서, 그들은 관찰과 기억, 형식을 통해 고요한 저항을 길러왔다. 환경을 단순한 배경으로 대하지 않고 살아 있는 재료로 받아들여, 이미지를 추출하는 대신 본질을 길어 올린다. 그림자는 물론 정적, 질감, 색조를 통해 일상의 파편을 모아내고, 그것을 다시 드러낸다. 그것은 장관이 아니라 계시로 다가온다. 때로는 무의식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과정을 통해, 의미는 하찮아 보이는 것들 속에서 길어 올려진다. 간과되고 평범한 것들이 문턱으로 변한다. 탁자 위의 컵, 황혼의 복도, 고개 돌린 인물. 이 순간들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 ‘목격된 것’이며, 목격됨으로써 변형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은 극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있으며, 가장 심오한 진실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 머무는 것’임을.
파토 보시치의 문호(門戶) 모양 캔버스 작업 《녹턴》과 《사자의 안뜰》은 대조적이다. 전자는 두 개의 기울어진 철제 말뚝이 표시된, 묘비 같은 아치 아래 안개가 뒤덮은 뒷골목 풍경이다. 달빛은 건물의 벽을 스치며 장면을 은은히 밝힌다. 반면 후자는 장밋빛이 감도는 환상적인 피라네시풍 건축적 구성이며, 창가에 서 있는 얼굴과 석조 받침 위의 악사가 옛 런던 벽돌을 기념한다. 각각은 런던의 거리시로 기능하며, 다양한 건축적 요소들을 하나의 화면에 응축한다. 이러한 작품들의 매력은 구조뿐만 아니라 색채와 분위기에도 있다. 《별자리 성(城)》은 작가의 스튜디오를 은유한 회화적 콜라주로, 성곽의 파편, 런던 거리, 폭풍우에 휩쓸린 폐허 등이 뒤섞여 엘 그레코의 《톨레도의 전경》을 연상시키는 격정적인 하늘 아래 펼쳐진다. 《동굴의 꿈 II》에서는 숲으로 둘러싸인 강줄기 위에 떠 있는 문과, 폭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는 속죄적 세례 혹은 창조적 변신을 암시하는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보시치는 자신의 런던 스튜디오에서 익숙한 요소들을 끌어와 꿈결 같은 ‘다른 곳’으로 전이시키며, 끝없이 방황하는 상상력의 경로를 따른다.
《성으로의 접근》의 대담하고 위압적인 성 입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리 풍경과 더불어 초현실적 색채를 띠며, 19세기 채색사진을 연상시킨다. 각각의 작품에서 색은 지배적인 색조로 작용하여 눈을 이끌고, 도시의 다양한 파편들을 조율된 색의 화음을 통해 하나로 묶는다. 《옴파로스》는 시공간의 진공 속에 포착된 건축을 청록빛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겹쳐진 시간’이라는 개념은 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며, 이 그림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난다. 《타이버른의 부상》은 두 가지 상반된 색채와 풍경이 병렬된 장면이다. 웅장한 강의 흐름은 기둥이 늘어선 텅 빈 거리와 나란히 놓인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비어 있는 공간을 보여주는데, 이는 무엇인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그러나 《강의 옴파로스》에서는 안개에 반쯤 가려진 세 인물이 뒷모습으로 런던의 메이플라워 술집을 향해 걸어간다. 붉은 잎사귀로 장식된 술집은 순례자들이 신대륙으로 떠나던 역사를 암시하며, 영적 여정이자 상상적 이주로 해석된다. 저 멀리에는 런던 금융가의 빌딩들이 보인다. 이 작품은 찬란한 하늘, 격류하는 강, 그리고 흙빛 전경으로 이루어진 삼분할 구도를 이룬다. 《화가의 탁자》(2025)는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가장 강한 작품이다. 물감과 팔레트가 제단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고, 순례자의 여정처럼 열린 공간을 향한다. 수평선 위에는 알렉산드라 팰리스와 런던의 익숙한 건축물들이 별자리처럼 빛난다. 나무 길은 호베마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고, 각진 탑은 작가의 비밀스러운 창작 행위를 암시한다. 그 너머, 첨탑 교회가 붉은 하늘에 실루엣으로 드리워져 있다.
토머스 캐머런 역시 같은 런던의 거리를 다루지만, 접근과 결과는 사뭇 다르다. 보시치가 불과 유황, 그리고 본질적으로 초현실주의자라면, 캐머런은 절제되고 억제된 태도를 보인다.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시키는 그의 색채는 대부분 누그러져 있다. 《리프트》에서는 유리 상자 안에서 사람들이 대화하고, 파란색·빨간색·회색의 조화가 장면을 완성한다. 《버스 정류장》에서는 빨간 플라스틱 좌석과 간판, 지붕이 수평으로 배치되며 순간적인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모자를 눌러쓴 구부정한 인물은 쇼츠 차림의 보행자들과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에 있다. 두 작품 모두 기하학적 구도와 제한된 팔레트로 정의되며, 다큐멘터리적 감각을 띤다.
《붉은 탁자》에서는 아이폰을 들여다보는 인물이 잘린 화면 속에 담겨 있고, 두 잔의 잔과 두 병이 균형을 맞춘다. 《노트북을 사용하는 여성》 역시 고도의 집중을 보여주며, 오늘날의 전형적 장면을 포착한다. 《프로즌》(2024)과 《패스트푸드 노동자들》(2022)은 그의 대표작이다. 《프로즌》은 혹독한 추위와 동시에 ‘Frozen Plus’ 미니마트를 가리키며, 서로 다른 방향의 인물 그림자가 교차하는 순간의 고립감을 담는다.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은 붉은 제복을 입은 인물들의 반복적 노동을 그리며, 도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단조롭고 황량한 삶의 단면을 제시한다. 그의 작품은 소비와 고립, 분열된 존재를 드러내며, 때로는 탈산업 시대의 무의미와 단절을 암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드가처럼 일상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패스트푸드 매니저》(습작)에서는 마틴 파를 연상시키는 사실적 묘사가 등장하며, 개별적 초상이라기보다 ‘보편적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최지원(Jione Choi)은 캐머런과 마찬가지로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지만, 서울을 자주 오간다. 시차가 몸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아는 이라면, 그의 작품에서 시간이 뒤틀리는 듯한 인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소재는 좀 더 친밀하지만 여전히 단절된 장면이다. 박물관 속 사람들, 추상화 앞에 선 세 명의 흐릿한 인물, 혹은 《연인들》 속 네 명의 관람객처럼. 그러나 이들은 정작 서로에게 무심하다. 《부재》에서는 인물이 남긴 그림자만이 화면에 남아 있다. 《방문》에서는 마치 관람객이 그림의 물감을 빨아들이는 듯한 기묘한 장면이 펼쳐지고, 《상점》에서는 박물관 상품을 응시하는 소비자가 등장한다. 그의 작업은 토마스 슈트루스의 《박물관》 시리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당신 마음의 은하》는 그의 모든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제목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관람객의 뒷모습은 그림에 등을 돌리고 있지만, 오히려 그림의 힘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이는 예술이 우리의 주의가 다른 곳에 있을 때조차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백일몽》(2025)에서도 피사체는 작품 속 풍경에 잠식되며, 예술이 지닌 개입의 힘을 강조한다.
세바스티안 에스페호의 작품은 모란디를 연상시키는 고요함을 지닌다. 《겨울 끝의 벚꽃》에서는 자연의 기하학적 선이 전경을 가르며, 《튤립과 풍경화》에서는 창가의 꽃병과 흐릿한 풍경이 병치된다. 《단풍나무》에서는 나무 하나를 선으로 된 울타리와 나란히 배치하며, 《붉은 도시》에서는 가을의 황금빛을 사진처럼 스냅샷으로 포착한다. 그의 작업은 전체를 그리는 대신, 잘린 단면 속에 응축된 현실을 담는다. 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 ― “모래 한 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 를 떠올리게 한다. 에스페호는 사소한 것 속에서 전체를 발견하며, 그 고요함 속에 강렬한 의미를 부여한다.
로자 호로위츠의 작업은 그의 유대인 뿌리와 여러 나라를 전전한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의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부유하며, 지아코메티처럼 희미하고 실존적이다. 《스톤헨지》에서는 영적 제의의 장소가 유령과 망령으로 뒤덮이고, 《오셀로》에서는 화려한 오페라와 셰익스피어의 서사가 파스텔 톤으로 환영처럼 재현된다. 색채를 통해 그는 질투, 순수, 악의 등 인간 감정의 극단을 무대 위에 올린다.
탐신 모스 역시 삶을 무대처럼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엘피스》에서는 거북이 무리가 개의 위협 속에서 희망을 상징하며, 소용돌이의 에너지가 인간과 동물을 감싼다. 《바보의 황금》에서는 두 인물이 사금을 채취하며, 배경의 색채는 장면의 감정을 반영한다. 분홍빛은 섬세함을, 파란빛은 긴장을 불러온다. 그의 작업은 호로위츠와 마찬가지로 색채를 통해 서사를 시각적 연극으로 변환한다.
아마도 이 전시를 하나로 묶는 요소는 색채와 파편성일 것이다. 세상은 다채롭고 분열적이며, 이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작가들은 이를 조용하면서도 독창적으로 포착해냈다. 각자는 형태보다 색채를 통해, 혹은 색채와 함께 정서를 전달한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연금술과도 같다. 보이는 것을 느껴지는 것으로, 익숙한 것을 초월적인 것으로 바꾼다. 그들의 시선은 표면 아래를 드러내며, 고독과 공허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오직 더 높은 목적만이 삶의 평범함이 남긴 공허를 채울 수 있음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