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미: 빨강의 기억 The Memory of Red
2025.4.30 - 5.10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효령로72길 60, 1F
Tel. +82.(0)2.3456.5096
고영미_불꽃_장지에 채색, 72x100cm, 2024
고영미_파괴하는 날개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97x291cm, 2024
고영미_장막_장지에 채색, 97x130cm, 2024
작가노트
빨강의 기억
나는 오랫동안 전쟁을 동화같은 풍경으로 은유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쇼펜하우어가 '이 세계는 이미지의 표상이다' 라고 말했듯이, 나에게 세계는 현실의 전쟁터와도 같은 이미지로 인식된다. 이러한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전쟁동화라는 개념아래 평면회화와 때로는 영상과 설치작업을 통해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를 나만의 상징과 은유의 언어를 통해 풍경으로 시각화해왔다. 이는 전쟁의 재현을 넘어 미디어가 보여주는 국제 분쟁과 한반도 핵 위협 속에서 예술가로서 느끼는 실존적 불안과 긴장을 시각언어로 형상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거대한 서사의 중심에 밀려난 존재들-비인간 생명체, 여리고 약한 생명들-의 죽음과 소멸에 주목해왔다.
고영미_피의 잔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30x97cm, 2024
고영미_빛의 무게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52x124cm, 2024
가장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보도사진들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행용 캐리어를 끄는 피난민들, 거리에 쓰러진 시신들, 죽은 여인의 알몸에 새겨진 표식 등은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인간성의 상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전쟁이 수많은 죽음을 야기해온 인류사의 반복된 비극임을 상기시킨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이 참혹함을 글과 그림, 사진으로 기록하며 기억해왔으며, 흘린 피의 이미지 때문에 전쟁을 떠올리면 자연히 연상되는 색은 빨강일 것이다.
이는 독일의 색채 심리학자 프릴링(Frieling)과 아우어(Auer)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빨강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항상 '피'와 '불'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입증한다.
제물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94x260cm, 2024
고영미_젖과 꿀이 흐르는 땅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62x360cm, 2024
이처럼 빨강은 피와 불, 즉 희생과 빛을 동시에 상징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작업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는 중요한 서사적 자원이 된다. 또한 빨강은 여성의 육체적 생리현상인 월경과 임신, 출산으로 인해 빈번하게 접하는 색으로 여성의 몸, 존재, 이야기들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간주되어 왔다. 또한 이러한 단순한 상징성 이상으로 여성의 자아와 감정, 존재의 해방을 표현하는 확장된 의미도 지닌다.
고영미_마르지 않는 샘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45x112cm, 2024
나는 지난 8년 동안 여섯 번의 유산과 아홉 번의 자궁 수술, 두 번의 출산을 통해 여성과 모성, 자아로서의 나에 대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위태로운 실존의 경계를 경험했다. 이 실존적 체험은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대한 질문, 감정의 정화를 탐색하는 길로 이끌었고, 가톨릭 성서공부를 통해 제물과 희생, 고통과 구원의 의미에 다가가게 했다. 이후 그리스도의 피의 잔, 성모마리아의 심장과 같은 상징적 모티브를 통해 고통의 이미지를 재구성하였으며, 만딜리온, TV화면, 커튼 등의 형상과 삼면화(혹은 이면화, 다면화)의 형식을 통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이처럼 나의 기억과 체험은 하나의 몸으로 체화되어 예술의 형식화를 통해 작업으로 나타나며 또 다른 생명을 얻는다. 이번 전시 『빨강의 기억』은 전쟁같은 외부의 폭력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내면적 상처와 생존의 서사까지 함께 포개어져 있다. 서구 미술사에서 오래 다뤄왔던 성인, 희생, 구원, 고통 등과 같은 전통적인 시각언어와 오늘날 현대적 갈등상황이 결합되어 창출된 다층적인 의미를 통해 희생이 단지 상실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해 다른 의미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성찰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영미_마더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62x130cm, 2024
정리하면, 내 작업에서 빨강은 전쟁과 여성인 자신을 모두 상징하는 중심 색채다. 색은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자 나를 둘러싼 내부와 외부의 환경에서 체험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집약한다. 옅은 분홍에서 진빨강, 어두운 빨강으로 변주되는 스펙트럼은 다양한 감정과 기억의 층위를 드러낸다. 나는 오늘날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점점 더 가까워진 전쟁을 응시하며, 그 안에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하나의 자아로서 투쟁하는 존재를 담아내고자 한다. 빨강은 나에게 자아 표현의 도구이며 동시에 세계와의 소통 창구다. 이 강렬한 색을 통해 나와 세계의 이야기를 배치하며 고통 너머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고영미_피의 조각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24x152cm, 2024
피의 조각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62x130cm, 2024
고영미_피의 조각_장지에 한지콜라주와 채색, 162x260cm,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