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가나문화재단ㆍ가나아트 특별 기획전, 《호랑이》
가나아트센터 SPACE 97에서 2025년 9월 26일부터 10월 19일까지
18세기 초부터 20세기에 이르는 호랑이 그림 총 16점 한자리에
〈호도〉부터 〈호작도〉, 〈호피도〉 등 다양한 유형을 통해 호랑이 상징의 원류를 되짚어
수호와 벽사의 상징에서 민중의 해학까지 호랑이 그림의 다채로운 변용과 의미를 조명
중국 북송에서 명으로 이어지는 ‘출산호도’ 형식을 따른 화원회화 계열의
18세기 초 〈호도〉 출품되어 주목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경기장 개장을 기념으로 개최된
《한국 호랑이 민화대전》(1984) 출품작이자 조자용 관장의 구장품 〈용호도〉 선보여
민중의 눈으로 다시 읽는, 친근한 호랑이 이미지의 재발견
또한 300여년에 걸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 속 호랑이의 자세를 한 자리에서 조망
‘케데헌’의 ‘더피’와 ‘수지’의 원형이 되는 ‘까치호랑이’ 그림을 통해
한국의 전통이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해온 과정 살펴
제공 가나아트센터
가나문화재단과 가나아트는 2025년 추석 연휴를 맞아 특별 기획전 《호랑이》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SPACE 97’에서 2025년 9월 26일부터 10월 19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가나문화재단 소장품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까치호랑이’ 계열 호랑이 그림 12점과 호피도 8폭병풍을 비롯해 호랑이를 소재로 한 작품 총 16점이 공개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 전통문화에서 수호와 벽사의 상징으로 여겨진 ‘호랑이’를 주제로, 조선 후기 회화에 나타난 호랑이 이미지의 다채로운 변용과 그 미학적 의미를 조명한다. 18세기 화원회화 양식의 〈호도〉부터 시작해 ‘케데헌’의 ‘더피’와 ‘수지’의 원형이 되는 ‘까치호랑이’ 그림 〈호작도〉의 다양한 작례와 화면 가득 호랑이 가죽을 세필로 그려 넣은 〈호피도〉 등을 통해,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일상의 보호자이자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해온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의 호랑이 미술은 그 기원을 찾자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 호랑이를 보고 그린듯한 사실적 표현의 호랑이 미술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이 시기 산신신앙(山神信仰)이 불교에 편입되면서 호랑이는 산신의 화신으로 신격화되었고, 한반도에 호랑이가 많았던 현실적 배경은 호랑이를 공포의 대상이자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했다. 결국 포악한 맹수의 본성은 용맹스러움으로 치환되었고, 호랑이는 수호와 벽사, 나아가 길상의 의미까지 동시에 상징하는 존재로 삶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제공 가나아트센터
호랑이 그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중국에서 전래되어 한국에 정착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북송대부터 은자를 상징하는 호랑이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내려오는 장면을 담은 〈출산호도〉가 제작되었고, 원대에는 소나무 위의 까치(報喜, 기쁜 소식)와 표범(豹와 報의 발음 유사)을 함께 그려 새해의 길상을 기원한 〈보희도〉가 성행했다. 이 두 도상은 명대를 거치며 접목되었고, 17세기를 전후하여 조선에 본격적으로 전래되어 김홍도의 〈맹호도〉를 위시한 화원회화 계열의 호랑이 그림으로 이어졌다. 이와 동시에 조선 후기 생활문화와 결합하며 민간으로도 확산되었다. 초반에는 까치가 생략되거나 단순한 배경 요소로 여겨졌으나, 후대로 갈수록 까치를 백성으로, 호랑이를 양반, 관리로 빗대어 풍자하는 해석이 더해지거나 ‘영리한 까치에게 골탕 먹는 호랑이’라는 민담이 반영되면서 까치가 여러 마리로 늘어나거나 호랑이의 얼굴이 어수룩하게 해학적으로 표현된 까치호랑이 그림이 등장하게 되었다.
제공 가나아트센터
전시 출품작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은 18세기 초반 작품으로 추정되는 〈호도〉[그림 1]다. 앞서 언급한 북송에서 명대로 이어지는 〈출산호도〉 계열의 작품으로 최근 공개된 리움미술관 소장의 1592년작 〈호작도〉와 화면 구성이 유사하다. 호랑이의 동세나 오른쪽으로 치켜 뜬 눈에서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지만, 전시 출품작 〈호도〉[그림 1]에서는 까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조선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화원회화 계열의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까치를 그리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호랑이의 묘사는 명대 호랑이 그림 화풍을 충실히 따랐으며, 배경의 소나무 표현에서도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화풍이 관찰되어 김홍도의 〈맹호도〉 이전에 그려진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까치호랑이 그림은 두 폭 가리개 형식으로 장황된 〈용호도(龍虎圖)〉[그림 2] 속 까치호랑이이다. 이 작품은 한국 민화의 시조 조자용(趙子庸, 1926-2000)의 구장품으로 반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지닌 작품이다. 1971년 조자용 관장이 펴낸 『한얼의 미술』, 1974년 『한호(韓虎)의 미술』이라는 책에서 공개된 것을 시작으로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4년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특별전시장에서 개최된 《한국 호랑이 민화대전》에도 나왔던 작품이다. 조자용 관장은 이 작품에 대해 “이조민화의 ‘까치호랑이 그림’을 대표한다고 하여도 좋을 만한 걸작품”이라고 했으며, 또 그림 속 호랑이 얼굴을 두고는 “마치 시골의 텁수룩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모습처럼 소박한 인격을 가진 듯이 느껴진다”라고 덧붙였다.
제공 가나아트센터
특히 1974년 그가 출판한 『한호(韓虎)의 미술』은 한반도의 호랑이 예술을 집대성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데, 이번 전시에서는 이 책에 수록된 작품 두 점도 출품된다. 하나는 당당한 풍채와 부릅뜬 눈매가 매서운 백호랑이가 까치와 눈싸움을 벌이는 〈백호도〉(개인소장)[그림 3]이고, 다른 하나는 호랑이를 산신령의 화신으로 본 산신신앙의 맥락 속에서 제작된 〈산신도〉[그림 4]이다. 산신 옆에는 졸린 눈을 한 채 엎드려 있는 토실한 백호랑이가 등장하는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어도 더없이 귀여운 모습이 흥미롭다.
이와 함께 최근 리움미술관 전시에 나온 88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모티브로 알려진 ‘피카소 호랑이’와 화면 구도와 얼굴 표현이 몹시 닮은 가나문화재단 소장 〈호작도〉[그림 5]도 전시된다. 두 작품은 서로 데칼코마니 같이 대칭되는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발과 수염의 표현과 자세가 매우 유사해 같은 작가가 그렸거나 같은 모본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도 유수의 민화관련 도록에 수록되어 있고, 2021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전시에 소개되는 등 세간에 꽤 알려진 작품이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턱 선이 인상적인 점 또한 그 특징이다.
제공 가나아트센터
조선 후기 호작도에서는 얼굴과 뱃가죽은 표범의 점무늬로, 등가죽은 호랑이 줄무늬로 묘사한 혼종의 ‘호랑이표범’ 도상이 자주 나타난다. 이는 이미 16세기 공신 초상화의 흉배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다. 맹수로서의 위상은 호랑이가 더 대표격이기 때문에 표범 무늬는 얼굴, 배, 꼬리 등 일부에만 적용하고, 전체적인 이미지는 호랑이로 표현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호랑이와 표범을 다른 종으로 구분하기보다는 ‘범’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한 가족단위, 암수 혹은 성체∙유체 정도의 차이로 인식했다고 보인다. 호랑이와 표범의 특징을 하나의 동물로 결합한 이미지는 중국이나 일본의 호랑이에는 없는 조선만의 독창적 특징이다.
본 전시는 시대에 따른 그림 속 호랑이의 자세 변화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가장 이른 것은 걸어 내려오는 듯한 ‘출산호도’ 계열이며, 17세기 중반에 등장해 20세기 초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형식은 출품작 〈백호도〉(개인소장)[그림 3]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앉은 자세 ‘좌호(座虎)’이다. 18세기 중반 경에 나타나는 것이 사선형 자세인데, 화면 하단에 앞발과 머리를 두고 몸통을 사선으로 뻗어 상단에 뒷발과 꼬리를 배치하는 구도이다. 이런 자세는 거친 필치의 소나무와 호랑이를 함께 그린 〈호도〉[그림 6]와 달빛 아래 대나무와 호랑이를 감각적으로 배치한 조선 말기 목판화 〈월하죽호도〉[그림 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호랑이 가죽을 그림으로 그린 〈호피도〉도 출품된다. 호랑이 여덟 마리가 금방이라도 몸을 틀어 병풍을 부수고 뛰어내릴 것만 같은 〈호피도 8폭 병풍〉[그림 8]의 위용은 대단하다. 사실 표범의 가죽을 묘사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호피도’로 불린다. 호피무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유행하는 문양인데, 이렇게 호랑이나 표범 무늬를 그림으로 재현해 병풍으로 제작한 사례는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조선 특유의 현상이다. 굵은 먹선으로 단순화한 호작도와 달리, 세필로 가죽의 털을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상당한 수공을 필요로 했으며, 벽사와 용맹의 상징을 담아 권력층의 공간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제공 가나아트센터
호랑이는 1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범띠 해마다 세상에 소환되고, 88서울 올림픽 ‘호돌이’와 2018평창 동계올림픽 ‘수호랑’처럼 국가 행사의 마스코트로 반복 등장하며 국민적 상징으로 자리해왔다. 코로나와 같은 역병의 시기에도 벽사와 수호의 의미로 다시금 불려왔듯, 호랑이는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순간마다 모습을 드러내 왔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이러한 호랑이의 소환이 최근에는 문화 콘텐츠의 영역으로 확장되며, 특별한 계기 없이도 ‘호랑이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가나문화재단과 가나아트는 특별기획전 《호랑이》를 통해 한국인의 삶 속에서 호랑이가 지닌 다채로운 상징과 미술적 의미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동시에 호랑이 상징의 원류를 되짚으며 수호와 벽사의 영물로서, 또 민중의 해학과 웃음을 담은 친근한 존재로서 호랑이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케데헌’의 ‘더피’와 ‘수지’처럼, 한국 전통의 모티프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하며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번 전시가 호랑이라는 한국적 상징이 지닌 보편성과 동시대적 매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