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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연대기 Moon Shin Chro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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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연대기 Moon Shin Chronology
2025-04-22 - 2026-08-30
문신미술관 원형전시관1
연보, 영상, 사진 등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같이 생활하며, 신처럼 창조한다.’
 

문신에게 삶은 예술이었고, 예술은 곧 삶이었다. 그의 강렬했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삶과 예술의 관계와 생애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짐작해 보고자 한다. 

문신이 살았던 시대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격동기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 전쟁, 급격한 산업화 등 혼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운명처럼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문신의 삶을 상세한 연보를 통해 살펴보자. 

문신은 1922년 1월 16일 일본 규슈 사가현 다케오의 작은 도시에서 아버지 문찬이와 어머니 치와타 타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유분방하고 개척 정신을 가진 아버지는 자신이 동경하던 비행사 안창남의 성을 가져와 문안신(文安信)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27년 5세가 되던 해, 문신의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마산으로 오게 되는데, 얼마지 않아 부모님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할머니와 숙부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그가 11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홀로 마산에 정착한다. 이때 문신은 어머니와 이별하게 된다.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문신은 자신의 예술적 근원이 아버지와 함께한 어린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훗날 자신의 작품이 추상적이나 자연의 생명성(체)을 연상시키는 것은 어린 시절 잠재의식의 발현이며, 아버지와 마산 바다에서 추억뿐 아니라 매사 최선을 다하는 부친의 생활 태도와 체질적인 성실성, 뜨거운 집착성이 문신의 정신적 바탕과 시련을 극복하는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십 대의 문신은 외국 명화를 다루는 화방에서 일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피카소, 세잔, 고흐 등 화집을 접하며 수많은 명화를 모작하는데, 특히 피카소의 작품을 이해할수록 ‘독창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16세쯤, 비밀리에 만주행을 계획하던 중 자신을 찾아온 친구의 권유로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있었기에 일본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던 문신이었지만, 미술을 공부하겠다는 일념이 그를 이끌었다. 일본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극장일, 목공, 구두닦이 등 아르바이트하여 학비를 충당하였고, 일부는 마산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 현재 미술관 부지를 매입하도록 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문신은 마산, 부산, 서울 등지에서 전시를 개최한다. <어부>(1946), <고추>(1946), <고기잡이>(1948), <뒷산과 하늘>(1948) 등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환경과 그 환경에서 생산되는 사물을 자신만의 색채와 형태로 대담하게 표현하는데, 서울 동화화랑에서 <제1회 문신 양화 개인전>(1948)에서 평론가 길진섭은 문신의 작품에서 ‘감득(感得)할 수 있는 솔직한 소박성’이 나타나며, ‘낡은 사상과 양식의 허의(虛儀)를 버린 작가’라 높이 평하기도 한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종군 화가로도 활동하며 <야전병원>(1952)을 통해 전쟁의 현장을 기록한다. 이후에는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겨 이규상, 한묵, 유영국, 박고석, 천경자 등과 더불어 <모던아트협회> 참여하는데, 이 그룹은 국전과 한국화단에 전위의식을 가진 30, 40대의 중견작가들이 결성된 그룹으로 모던아트의 기치를 내걸고 자신의 창작 이념을 바탕으로 예술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내세운다. 문신은 이 시기에 추상으로 전환하는데 <암소>(1957), <정물>(1959), <태평로에서>(1959) 등에서 표현주의와 입체주의가 추구했던 조형적 실험을 엿 볼 수 있다. 

1961년 문신의 나이 39세에 프랑스로 향한다. 20시기 초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는 다양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으며, 엥포르멜, 타시즘, 신사실주의 등 추상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문신은 1961년부터 1980년까지(1965-1967 일시귀국) 프랑스에서 생활한다. 1960년대는 문신의 새로운 예술이 열리는 시기로 재료, 형상 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추상의 세계에 몰두한다. 이러한 시도는 <사랑>(1962), <무제>(1964), 조각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1966-1967)에서도 나타난다. 

1967년 문신은 갤러리스트 존 크라븐이 커미셔너로 활동한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하여 <태양의 인간>(1970)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조각가로 활동한다. 문신은 추상성과 입체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고, 원과 선이라는 기본적인 구조에서 출발하여 구축, 반복, 변화하면서 자신만의 좌우 균제(시메트리, Symmetry)의 구조적 기본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롭고 독창적인 형상을 창조한다. 

1978년 인생의 동반자인 한국화가 최성숙을 프랑스에서 만나, 1980년 한국으로 함께 귀국한다. 이는 고향 땅에서 작업하며 뼈를 묻고 싶다는 문신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관 건립 공사(1980-1994)는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행되었으며, 문신은 도면 스케치부터 옹벽의 돌 하나 쌓는 것까지 직접 참여했다. 작품이 팔릴 때마다 미술관 공사에 투입했고, 공사 시작 6년 만인 1987년부터 미술관 건물을 올릴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1988년 서울올림픽 공원에 열린 《서울올림픽 국제 야외 조각 초대전》에 높이 25m의 <올림픽 1988>을 출품한다. 1990년 문신미술관 전시관 2동을 완공하고, 10월 문화부에 재단법인 문신미술관을 등록하는 등 숨 가쁜 일상에서도 문신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유럽을 순회하며 개인전을 개최하는데, 이 기간에 무려 20여 회의 전시를 개최하고 참여한다. 문신을 기억하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하루는 25시간이었다’라고 전할 만큼 손에서 작업을 놓지 않았으며, 쉴 틈 없이 미술관 공사에 힘썼다. 1994년 5월 27일 문신의 예술 인생 50년을 회고하는 《문신 예술 50년》 전시와 함께 문신미술관을 개관한다. 미술관 개관이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문신은 지병이 악화하여 1995년 5월 24일 타계한다. 

문신의 삶은 그의 마지막 말처럼 오직 예술을 위해 자신을 산화하였으며, 시민의 문화적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문신미술관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리고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예술에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였다. 그의 마음과 손길이 닿아있는 여기 문신미술관에서 그의 치열했던 삶과 작품을 온전히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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