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Grey Matters 2020-24), 2020, Oil on palette paper, perspex frame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Belvedere》
가나아트 한남 (서울시 용산구 장문로 54)
2025. 4. 3. (목) – 2025. 5. 8. (목) (총 35일간)
가나아트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현재 벨기에 브뤼셀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작가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Jean-Baptiste Bernadet, b.1978)의 개인전 《Belvedere》를 개최한다. 베르나데의 작업은 완결된 이미지나 서사 대신, 회화라는 매체가 감각, 시간, 기억과 같은 비물질적 경험을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의 작품은 상하이 롱 뮤지엄(Shanghai Long Museum), 네덜란드 보를린덴 미술관(Museum Voorlinden), 이탈리아 현대미술관(MART), 프랑스 발드마른 현대미술관(MAC VAL) 등 여러 주요 미술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베르나데의 개인전으로 그의 대표 연작인 Fugue 시리즈의 신작 16점과 드로잉 연작 Gray Matters를 선보인다.
베르나데의 작업은 때때로 클로드 모네, 조르주 쇠라, 피에르 보나르와 같은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사용한 색채나 기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특정한 미학적 경향이나 양식에 머무르지 않고 미술사 속 다양한 조형 언어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가 작업에서 사용하는 색채는 특정 대상이나 자연의 인상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작가가 그때그때의 감각과 직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회화를 개인의 내적 고백이나 직접적인 감정 표출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회화를 고정된 형태나 의미를 갖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상태로 바라본다. 이는 그의 작품이 보는 이의 개인적 시선과 환경,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경험되며 관람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베르나데는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집중하며, 회화적 표현에 남겨진 시간과 감각의 흔적에 주목한다. 특히 캔버스의 물질성과 기억, 감정, 인식의 흐름과 같은 비가시적 경험 사이의 긴장과 대비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베르나데의 대표 연작인 Fugue 시리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는 음악의 푸가처럼, 유사한 구조를 반복하면서도 색과 붓질의 변주를 통해 화면의 밀도를 쌓아간다. 그는 콜드 왁스와 알키드를 섞은 유화 물감을 얇은 붓으로 빠르게 중첩해 화면을 고르게 채우며 형상이나 제스처, 노동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율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작가가 화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최소화하려는 태도를 반영한다. 그렇게 겹겹이 쌓인 붓질은 화면 위에서 질서와 우연이 교차하는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며 각각의 작품은 독립적인 동시에 그의 전체적인 작업 세계를 이루는 한 조각이 된다. 그는 화면의 중심이나 강조점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구성을 통해 관람자의 시선을 특정 지점에 고정하기보다, 전체 화면을 유연하게 이동하도록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구체적인 형상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감각과 기억을 자극해 자연 풍경, 물결, 빛의 반사 같은 이미지를 자유롭게 연상하게 한다. “내 작품이 하나의 선명한 소리처럼 명확하면서도, 동시에 사라지기 직전의 상태처럼 보이길 원한다”는 베르나데의 말처럼, 그의 화면은 회화적 경험을 개인의 내면적 체험으로 확장한다.
전시 제목 벨베데레(Belvedere)는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풍경’을 의미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작업은 추상이면서도 어딘가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지각의 경계에 머문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Fugue 연작은 모두 16:9 비율의 동일한 크기 캔버스에 그려졌으며 나란히 배치된 작품들은 영화 속 스틸컷처럼 시퀀스를 이루며 시각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각 작품은 창문 너머 펼쳐지는 풍경처럼 전시 공간의 물리적 범위를 넘어 관람자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감각의 열린 통로가 되어 새로운 시각적 여정을 제시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Gray Matters 시리즈는 작가가 작업 중 사용한 종이 팔레트를 바탕으로 제작된 드로잉 연작으로 일종의 시각적 일기이자 작업 과정의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적인 손의 움직임과 물감의 얼룩이 쌓여 형성된 이 작품들은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베르나데가 비가시적 감각을 회화적 언어로 변환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단서이자 결과물이다.